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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o Story

[종이달] - 결핍, 도피, 정체성으로 드러나는 내면의 균열

by canadamiso 2025. 12. 7.

[종이달] - 결핍, 도피, 정체성으로 드러나는 내면의 균열

<종이달>은 완전해 보였던 일상 속에서, 아주 작지만 치명적인 틈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조용하지만 섬세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범죄극도, 도덕적 비극도 아닙니다.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며 언제나 ‘모범’과 ‘정상’의 틀에 맞춰야 했던 한 여성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은 채 살아가고 있었음을 자각하게 되는 감정의 여정입니다.

주인공 리카는 은행에서 일하며 안정적인 삶을 사는 중년의 여성입니다. 결혼도 했고, 큰 탈도 없이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실상 그녀의 삶은 정지된 것처럼 보입니다. 무표정한 얼굴, 단절된 대화, 건조한 부부 생활. 모든 것이 평범한 듯하지만, 그 안엔 감정의 맥이 끊긴 듯한 고요한 파열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은행 고객의 돈을 조금씩 빼돌리기 시작하며, 일상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행복해 보이는 삶에는 과연 진짜 감정이 존재했을까?”


결핍: 욕망이 아니라 결여에서 시작된 변화

리카의 범죄는 탐욕에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녀의 행동은 무언가를 얻으려는 욕망보다는, 오랫동안 억눌려온 감정적 결핍에서 비롯된 반응처럼 그려집니다. 남편은 그녀의 내면에 관심이 없고, 직장은 무미건조하며, 주변은 그녀를 ‘그저 착실한 여성’으로만 바라봅니다. 그 틀 안에서 리카는 서서히 존재감을 잃어가며, 점차 무력해지고 투명한 존재로 변해갑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손을 뻗은 돈은 단지 물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증명이었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주목하지 않는 삶에서, 스스로를 다시 ‘살아있는 존재’로 느끼기 위한 본능적인 충동. 그 돈을 통해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현실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라는 환상을 얻고, 그 환상은 곧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집착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왜 훔쳤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대신 ‘왜 그렇게까지 공허했는가’를 파고들며, 그 결핍의 층위를 한 겹 한 겹 벗겨냅니다.
 “누군가의 관심보다 더 절실했던 것은, 스스로 살아 있다는 감각이었다.”


도피: 멈춰버린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결핍에서 비롯된 감정은 결국 도피로 이어집니다. 리카는 젊은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잊고 지냈던 열정과 감각을 다시 마주합니다. 누군가의 눈빛 속에 존재감을 느끼고, 감정을 주고받으며 하루를 기대하게 되는 그 감각은, 그녀가 도시의 평면적인 삶 속에서 잃어버렸던 모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관계는 진짜 사랑이라기보다는 자기 존재를 확인받고 싶은 욕망의 반영이었습니다. 리카는 점점 더 많은 돈을 유용하며, 자신이 쌓은 환상 속에 깊이 빠져들고 맙니다. 처음엔 작았던 금액은 점점 커지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게 됩니다. 도피는 해방감을 줬지만, 동시에 새로운 불안과 집착이라는 족쇄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그 어떤 판결도 내리지 않습니다. 대신, 감정적으로 리카의 심리를 따라가게 만듭니다. 관객은 점점 그녀를 이해하게 되지만, 동시에 그녀의 선택이 주는 비극성도 피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도망치고 싶었던 삶의 끝에는, 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체성: 무너진 삶 속에서 다시 자신을 바라보다

리카의 정체성은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은행원으로, 아내로, 모범적인 사회인으로 살아가던 이전의 자아. 다른 하나는 도덕의 경계를 넘으면서도 감정적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는, 새로운 자아입니다. 그녀는 이 둘 사이에서 흔들리며, 점차 자신의 진짜 얼굴은 무엇인지를 되묻기 시작합니다.

정체성을 잃은 사람은 방향을 잃은 사람과 같습니다. 리카는 그런 상태에서 삶을 이어가다가, 결국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그 무너짐은 단지 몰락이나 파멸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화는 그 무너짐 속에서 처음으로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순간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뒤, 가장 본질적인 질문만이 남습니다. “나는 누구였고, 무엇을 원했는가?”

이 장면에서 영화는 리카를 완전히 단죄하거나, 완전히 구제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선택과 그 여파는 그대로 두면서도, 관객에게 감정적으로는 이해의 문을 열어줍니다. 우리는 리카를 비난하면서도, 그녀 안에서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정체성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삶의 균열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결론 - 사라지지 않는 질문만 남았다

<종이달> 은 정답이 없는 질문들을 남긴 채 끝납니다. 리카는 결국 사회적 지위를 잃고, 신뢰도 무너지고, 평범했던 일상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었는지를 성찰하게 됩니다.

영화는 한 여성의 파국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쉽게 ‘정상’이라는 껍데기 속에 갇히는지, 그리고 그 틀을 깨고 나와 본질적인 나를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리카의 이야기는 범죄가 아닌, 자기 인식의 고통스러운 통로로서 기능합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삶은, 지금의 삶과 얼마나 닮아 있는가?”

<종이달> 은 그렇게 묻습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질문, 놓치고 살아온 감정들, 그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균열의 순간들을 담담히 끄집어냅니다. 그래서 더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