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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o Story

[서울의 봄] - 선택, 권력 그리고 성찰

by canadamiso 2025. 11. 17.

<서울의 봄> 12.12 그날 밤 감춰진 9시간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난 뒤, 긴 여운이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건, 이미 교과서에서 수없이 배운 1979년 12월 12일의 군사 반란.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그 익숙한 사건 속에서 전혀 다른 ‘오늘의 진실’을 마주했습니다.
김성수 감독은 단지 과거를 재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날 밤, 우리가 ‘역사’라고 단정했던 시간 속에 얼마나 많은 선택의 순간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며 질문을 던집니다. “정말 그것은 막을 수 없었던 비극이었는가?”
이 질문은 단지 과거의 정치군인들에게만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의 이름으로, 혹은 무지의 이름으로, 오늘의 우리 또한 얼마나 많은 침묵과 방관을 선택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역사와 인간의 선택 — ‘막을 수 있었던 밤’의 재구성

영화는 1979년 10·26 사태 이후부터 12·12 군사반란이 벌어진 하루의 시간에 집중합니다. 전두광(전두환을 연상시키는 인물)이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벌이는 일련의 움직임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선택의 연속’으로 그려집니다. 자칫 이러한, 결과적으로 성공을 이끌어내는 모습으로 전두광을 합리적 지략가로 보여주는 대사들이 있어 미화처럼 보일 위험도 있어 보이지만, "분명한 선악 구도"를 통해 위험과 오해의 소지를 완전히 해소시켰다고 봅니다. 
나는 영화를 보며, 우리가 흔히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던 역사적 관용구가 얼마나 위험한 자기면죄였는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전찬일 평론가의 표현처럼, “그날은 막을 수 있었던 비극이었다.” 영화는 그 ‘막을 수 있었던 밤’을 한 장면 한 장면 되살려 보여줍니다.
각 인물의 선택이 얼마나 많은 갈림길을 만들어내는지, 특히 정우성이 연기한 이태신(실존 장태완 대령을 모티브로 한 인물)의 결단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는 끝내 타협하지 않습니다. 군인으로서,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지키려다 고립되고, 그로 인해 비극을 맞이하지만, 그 고독한 신념은 관객의 마음속에서 오래 살아 움직입니다.
김의성이 맡은 국방장관 오국성(노재현 전 장관을 연상시키는 캐릭터)은 또 다른 의미의 선택을 보여줍니다. 그는 잠옷 차림으로 등장해 혼란 속에서 우왕좌왕하지만, 결국 그의 ‘도장 한 번’이 사건의 향방을 결정합니다. 이 장면은 인간의 무책임이 어떻게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지를 상징합니다.
이처럼 영화는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선택의 연쇄’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해부합니다. “나는 그때 무엇을 선택했을까?”라는 물음이 영화 내내 내 안을 울립니다.


권력과 욕망의 미학 — 미화와 매혹 사이의 긴장

황정민이 연기한 전두광은 분명 ‘악인’입니다. 그러나 그 악인은 우리가 예상한 단순한 폭군이 아닙니다. 그는 지략가이며, 합리적 언어로 부하를 설득하는 냉철한 인물입니다. 그의 대사는 종종 설득력 있고 심지어 매혹적이기까지 합니다.
라이너의 해석처럼, 이 지점에서 관객은 일시적인 혼란을 경험합니다. 악당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언변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김성수 감독의 치밀한 연출 의도입니다.
악의 본질은 잔혹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언어를 가장한 탐욕"에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전두광은 끊임없이 ‘질서’와 ‘안정’을 말합니다. 그는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논리 뒤에는 철저히 사적 권력욕이 숨어 있습니다.
영화 후반부의 한 대사, “사람들은 강력한 지도자가 자신들을 이끌어주길 원한다. 민주주의는 허상이다.” 이 문장은 단순한 과거의 회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지금의 사회와도 연결되는 냉소적 거울입니다.
권력은 늘 ‘안정’을 명분으로 욕망을 포장해왔고, 우리는 종종 그 ‘이성적 언어’에 안도하며 현실을 합리화해왔습니다.
따라서 영화는 단순한 역사극이 아니라, 권력과 미혹의 언어를 해부하는 정치철학적 드라마로 읽힙니다.
황정민의 연기가 ‘너무 잘해서 위험하다’는 평이 나올 만큼 매혹적인 이유는, 그가 ‘악을 설득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연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관객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합니다. 악이 우리와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분노와 성찰의 영화 — 잃어버린 봄, 그리고 오늘

이 영화의 제목 ‘서울의 봄’은 단순한 계절적 은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지 못한 민주주의의 계절'을 뜻합니다.
“서울의 봄은 결국 오지 않았다.” 그 봄은 일부 군인들의 욕망에 짓밟혔고, 그 뒤로 우리는 5·18의 피를 보았습니다.
영화는 바로 그 ‘잃어버린 봄’에 대한 추모이자, 우리 시대를 향한 경고입니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두 가지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하나는 분노이고, 다른 하나는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분노는, 그날의 불의가 너무나 뻔뻔하게 진행되는 장면들에서 솟구쳤고, 부끄러움은, 그 불의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과거의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하지만〈서울의 봄〉은 “우리 손으로 단죄하지 못한 분노의 역사”를 다시 꺼내놓습니다.

비슷한 맥락의 영화(나는 사건이라는 단어도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로 역사의 죄인을 단죄하지 못한 현실에서, 아이히만 재판(아이히만 쇼)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되짚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역사적 병치가 아닙니다.

‘악의 평범성’을 다룬 한나 아렌트의 통찰처럼, 영화는 묻습니다.
“나는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말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폭력을 정당화해왔는가?
‘서울의 봄’은 우리 모두가 그 ‘평범한 아이히만’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김성수 감독의 연출은 단호하면서도 여유가 있습니다. 이전작 *〈아수라〉*가 분노의 폭발이었다면, 이번 영화는 분노를 ‘절제된 리듬’으로 담아냈습니다.
유머와 정적이 교차하며, 긴장 속에서도 인간적 호흡을 잃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끝나도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관객들은 애플워치를 차고 심박수를 인증하며 ‘서울의 봄 챌린지’를 벌일 정도로 몰입했고, 특히 20~30대 여성층의 지지가 예상 밖으로 높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 영화에서 단순한 역사 복습이 아니라, ‘시대의 정의에 대한 감정적 공명’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론: 잃어버린 봄을 기억하는 일

〈서울의 봄〉은 단순히 1979년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의 우리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핵심 질문은 단 하나입니다.

“그날 밤,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

역사는 언제나 반복됩니다. 그리고 그 반복의 고리를 끊는 것은 제도나 이념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입니다.
김성수 감독은 그 사실을, 배우들은 그 감정을, 그리고 관객은 그 책임을 각자의 자리에서 받아들입니다.
전두광의 차가운 언어, 이태신의 분노 어린 침묵, 오국성의 어리석은 도장 하나가 모여 한 시대의 운명을 바꾸었듯,
우리의 작은 선택 하나도 결국 내일의 역사를 결정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단순히 ‘과거 회상’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양심의 기록’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서울의 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봄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피어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잊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선택할 때 비로소 찾아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