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개 및 배경
2023년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Un Certain Regard)’ 부문에 초청된 안소니 첸 감독의 신작 <브레이킹 아이스>는 팬데믹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감정과 고립, 그리고 연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은 중국의 연변 자치주, 즉 조선족이 다수 거주하는 북쪽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흰 눈으로 뒤덮인 도시의 정서... 그것은 마치 주인공들의 내면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는 한 여행 가이드 ‘나나’, 그리고 그녀와 잠시 시간을 보내게 되는 두 남성, 즉 고향으로 돌아온 남자와 나나를 짝사랑하는 또 다른 남자의 짧지만 깊은 여정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삼각관계나 로맨스가 아니라, 청춘들이 서로를 통해 자신을 비추고 치유받는 감정의 흐름으로 그려집니다.
감독은 이 세 인물의 정체성을 굳이 ‘중국인’, ‘조선족’으로 한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문화적 구분보다는 보편적인 인간관계의 온기, 거리감, 낯섦에 주목하며 관객이 국적이나 언어, 민족을 넘어 순수한 감정에 집중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브레이킹 아이스>는 종종 ‘중국판 <고양이를 부탁해>’ 혹은 ‘<몽상가들〉을 연상케 하는 영화’로 소개됩니다. 특히 세 명의 인물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역학, 불완전하지만 치열한 청춘의 감정선, 그리고 삶의 공허함을 배경으로 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가 보여주던 자유로운 리듬과 깊은 정서를 떠올리게 합니다. 연변이라는 지역적 배경도 이질적인 공간이 아니라, 정체성과 경계가 혼재된 현대 사회의 상징처럼 다가옵니다.
의도
감독 안소니 첸은 이번 영화를 통해 기존의 창작 방식을 깨고자 했다고 합니다. 그는 전작 <일로 일로>로 칸 영화제 황금카메라상(Caméra d’Or)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지만, ‘너무 정교하다’, ‘너무 완벽하게 통제된 연출이다’라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좀 더 유연하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청춘의 감정을 담아내려는 시도를 했다고 언급했습니다.
첸 감독은 <브레이킹 아이스>를 만들기 전,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고 했는데. 첫째, 젊은 세대의 이야기를 할 것. 둘째,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장소에서 찍을 것. 셋째, 계절이 없는 싱가포르가 아닌 겨울의 풍경을 담은 영화를 만들 것. 이 원칙을 충실히 따르며 그는 중국 지도를 탐색하다 백두산을 발견했고, 직접 백두산 천지를 등반하며 “이곳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는 백두산 인근의 도시이자 조선족의 문화와 중국 문화가 혼합된 독특한 공간인 ‘연변’을 배경으로 택했고, 도시에서 자연으로, 인공에서 본질로 향하는 이 여정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닌 영적 해방(Spiritual Freedom)의 은유가 된 셈입니다.
또한 영화 속 등장하는 한글 간판, 한복, 아리랑 등 한국적 요소들은 인위적으로 설정된 것이 아닌, 그 지역이 지닌 자연스러운 풍경 속 일부로 녹아 있습니다. 첸 감독은 한국 문화에 대한 특별한 선입견이나 연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밝히며, 결국 이 영화의 중심에는 국경을 초월한 감정의 보편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메시지
<브레이킹 아이스>는 단지 세 명의 청춘이 함께 보내는 시간을 기록한 영화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안소니 첸 감독이 팬데믹을 통과한 세계의 젊은 세대에게 보내는 영화적 위로이자 러브레터입니다. 팬데믹 당시 문을 닫은 극장들, 침체된 영화산업,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적 단절과 불안 속에서 고립된 채 살아가야 했던 청춘들의 현실이 마치 이 영화로 녹아들어 가는 느낌입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우리는 “세상이 너무 비싸졌고, 모든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느끼는 젊은이들”에 관한 기사를 자주 접하기도 했는데 이 속에서 감독은 영화를 통해 “너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고, 그 안타까운 감정을 고스란히 〈브레이킹 아이스〉에 담아내는데 성공했다고 보입니다.
이 영화는 플롯 중심의 상업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캐릭터 간의 대사, 길거리의 눈 풍경,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도시의 표정, 손끝의 떨림 같은 섬세한 감각들이 감정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모든 장면에는 불완전하지만 진심 어린 시선이 담겨 있고, 관계와 감정의 변화는 빠른 전개 대신 느릿한 호흡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자극과 속도에 길들여진 현대 관객에게 필요한 디톡스 영화”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지금의 20대가 느끼는 불확실성과 고립감, 그리고 연결에 대한 갈망을 담아내면서 관객 각자가 가진 상처의 층위를 자극하지 않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위로를 건넨다는 어느 평론가의 말이 매우 실감이 납니다. “길을 잃었지만,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팬데믹 시대를 살아낸 모든 이들에게도 적용되는, 보편적이고 강력한 위안의 언어로 모든 관객들에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결론
<브레이킹 아이스>는 안소니 첸 감독의 새로운 시도이자, 팬데믹 시대 이후 젊은 세대에게 보내는 영화적 편지입니다. 연변이라는 공간의 문화적 경계를 활용하여 보편적 인간 감정을 풀어내고, 자연과 도시를 오가는 여정을 통해 영적 해방을 그린 이 작품은 단순한 청춘 영화의 범주 이상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전달하는 감정의 진실성과 여운이며, 빠르게 소비되는 콘텐츠와 즉각적인 자극이 가득한 시대 속에서, <브레이킹 아이스> 는 ‘멈추고 느끼는 시간’의 가치를 일깨워 줍니다. 아직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이 영화는 조용히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너는 혼자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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